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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 이럴 생각 아니었다고. 대장 나리........”
허건오는 부들부들 떨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그어왔다. 이만 일로 동요하거나 죄책감 느끼는 날이 다시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 없었다.
이게 빌어먹을 개꿈이길 바라며 두 눈을 꽉 감고 그 조그만 할머니를 생각했다. 인간시대에라도 나올 것 같은 소박하고 선량한 할머니.
멀끔한 엘리트인 대장 나리가 어째서 자신이나 고릴라 같은 인간쓰레기와 함께 영감 뒷구멍이나 닦아주게 됐는지는 어렴풋이 전해들었다. 지난 여름 매스컴을 한바탕 뒤집었던, 경찰 간부의 뒤늦게 밝혀진 비리.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기에 언론도 사양 없이 떠들었다. 자신도 그때는 짭새들이 착한 척 해봐야 결국 저꼴이라고 비웃었을 터다.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꺼내 감방에 넣을 순 없어도 그 유산과 가족을 터는 건 가능했던 모양이었다. 일찍 과부가 되어 안 그래도 아들뿐이었을 어머니는 몰락해 월세방에 들면서부터 더 늙고 작아져 아들에게만 의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아들의 동료라는 말에, 이런 장님이라도 알아볼 양아치까지 믿고 집안에 들여준 건데.
“너 임마 이거 어쩔 거야......”
“시끄러, 고릴라.”
허건오와 김주황의 시선이 다시 바닥을 향했다. 뒤엎어진 물건들 사이로 산산이 흩어진, 하얀 도자기 파편들을.

 

“지, 지, 진정해. 비싼 물건은 아니라고. 사채꾼의 눈썰미니까 믿어봐라. 응?”
고릴라 주제에 두 눈 왕방울 만하게 뜨고 불불 떨며 그리 말하니 도리어 몇 천만 원 어치 골동품이 아닐까 하는 무시무시한 가정이 머리에 스쳤다.
이런 집에 살면서 그런 게 있겠냐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한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자존심일 수도 있고, 나름대로 마지막 남은 비자금 같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비리 경찰일망정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사람의 마지막 유품일 수도......
끝장으로 치달아가는 상상력에 제동을 거느라 허건오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 입 밖으로 소리가 새나가 그 할머니가 듣기라도 했다간, 그랬다간!
“그런데 할머니, 이거 깨지는 소리 못 들으셨나?”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숨을 죽이고 바깥 기척을 느껴보았다. 크지 않은 집의 두텁지 않은 벽을 타고 아마도 저녁을 준비하는 듯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태평하게 전해져왔다.
귀가 어두우시든가, 때마침 물을 받고 있었다든가 했던 모양이다. 안도감과 더불어 죄책감 한 뭉텅이가 다시금 머리에 떨어졌다.
없는 살림에도 자기 같은 놈들까지 밥을 해주겠다고 저러고 계시는데.
공연히 대장 나리는 집에서 뭐하고 노는지 궁금하다고 쑤석거리는 게 아니었다. 구석에 밥상 하나가 더 있고 거기 형법이니 경찰 조례니 재수없는 책들이 필기구와 노트북과 함께 쌓여있는 걸 보고, 엘리트 경찰 나리는 빨간 책 한 권도 없냐고 투덜대며 뒤적였다.
그냥 그러게 놔뒀으면 될 것을 공연히 저 무식한 고릴라가 남의 물건 건들지 말라고 형이랑 똑같은 소리나 해댔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대장 나리네 집에서까지 고릴라와 드잡이질은 안 했을 텐데.
“새끼, 이 지경이 돼서 내 탓이냐?”
고릴라의 주먹이 후려갈긴 뒤통수를 쥐고 허건오가 눈을 흡떴다.
“아 언제 초능력이라도 생겼어? 생각한 거 갖고 지랄이야.”
“입 밖으로 다 나왔거든. 우리끼리 싸울 때야? 이거 어떻게 정리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럼 고릴라가 그 초능력으로 싹 다시 붙여보든가!”
평소라면 이대로 다시 치고받고 끝이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입으로 떠드는 것조차 속닥거려가며 방 안을 살폈다.
대장 나리의 CSI 장비가 없어도 상황은 명백했다. 증거조작과 인멸을 위해 해야 하는 일도 명백했다.
김주황이 먼저 뒤엎어진 밥상을 제자리에 세워놓았다. 허건오도 조심스럽게 책과 노트북을 그 위에 돌려놓기 시작했다.
책이 어떤 순서로 쌓여있었는지 쌓다 보니 헷갈렸다. 형법이 제일 위였던가? 아니, 이 고시책이?
“아, 이 퍼런 책이 위였어. 까만 건 중간!”
“이게 더 퍼렇잖아. 이게 더 위였다고.”
책과 함께 필기구도 잔뜩 흩어졌다. 싸울 때가 아니라는 자각이 있어서인지 투닥대면서도 결국 허건오가 책을, 김주황이 필기구와 문구류를 맡았다. 책을 제법 가지런하게 쌓고 노트북을 놓자 김주황이 한주먹 되는 필기구를 어디다 둘 지 몰라 허둥거렸다.
“대장 나리는 이걸 어떻게 다 그렇게 멀끔하게 쌓아놨던 거야?”
“엘리트의 비법 같은 게 있나?”
결국 책과 책 틈새에 적당히 흩어지지 않게만 놓았다. 이제 바닥에 남은 건 흰 도자기 파편뿐이었다.
생각보다 작은 물건이었나보다. 작고 새하얀 그릇이었어.
지금 원래 모양을 생각해낸다 해서 도로 붙일 수도 없지만 허건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대장 나리의 책은 다 여러 번 끝까지 읽은 티가 났다. 펼쳐보면 형광펜도 잔뜩 긋고 문제도 새카맣게 풀어놨으리라. 평소의 빈틈없는 모습과는 맞지 않게 꼬질한 책을 보면 꼭 대장 나리 같은 통찰이 없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은 학교 다닐 때도 문제집 한 권 제대로 풀어본 적 없었다. 그런 자신을 범생이들은 벌레 보듯 하며 가까이도 오지 않으려 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대장 나리처럼.
대장 나리는 그래도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의 범생이들과는 달리. 딱딱 존대를 하고 예의를 차리고. 그게 더 역겹다고, 위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위선이 아니었다면, 대장이 그 범생이들처럼 솔직한 새끼였다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함께 드런 일 하면서 서로 믿지도 못하고 억지로 만날 때마다 기분 좆같은 그런 사이로 남지 않았을까.
“사과해야겠네.”
김주황이 허건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애송이 방금 뭐라고 했냐?”
“사과해야겠다고. 어쨌든 이거 도로 붙일 재주는 없잖아. 있냐?”
김주황은 허건오가 눈앞에서 잠자리 날개 돋은 꼬마 요정으로 변신하기라도 한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다 대고 ‘고릴라 귀먹었어?’라고 할 의욕도 없어 허건오는 묵묵히 주저앉아 깨진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 꼴을 멍하니 쳐다보던 김주황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 그러다 손 다친다. 빗자루 가져올 테니 기다려.”
그리고 돌아서서 문에 손을 댄 순간 드르륵 문이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평소나 똑같은 모습의 하태성 경위가, 말문이 막힌 김주황을 보고 경계하는 빛을 띄웠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어....”
“새 지시가 내려왔습니까?”
“아냐, 그런 건.”
허건오가 나섰다.
“미안해, 이거 내가 깼어.”
‘우리가’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실수했다. 정정할 새도 없이 고릴라는 더 놀랐고 대장 나리는 고개를 내밀어 바닥을 보았다.
“아.”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허건오를 보았다.
“다치진 않았습니까?”
“어? 어.....응!”
“그럼 빗자루하고 솜 가져오겠습니다. 밟지 않게 가만히 계세요.”
둘 다 말문이 막혀있는 동안 하태성은 정말로 가서 그 두 가지를 가져왔다. 그리고 평소 태도 그대로 바닥을 깨끗이 쓸고 탈지면을 뜯어 바닥을 닦았다.
“거.....솜으로 하면 뭔가 더 좋은 거야?”
김주황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유리나 도자기는 미세한 가루가 나중까지 남아 손발에 박히기 쉽습니다. 솜으로 닦으면 그런 것이 솜에 붙어서 나중에 다칠 걱정이 없습니다.”
“증거 인멸이란 거 어렵네.”
하태성이 고개를 들자 김주황은 핫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할 거 다 해놓고 무슨 착한 척이냐는 소리가 이젠 나오지 않았다.
“이건 어머니께 배운 겁니다. 저도 어려서 그릇 깬 경험 정도는 있으니까요.”
“헤에. 대장 나리가?”
이번엔 김주황도 허건오도 진심으로 놀랐다.
“대장 나리는 날 때부터 대장 나리인 거 아니었어?”
“네? 절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럼 대장 나리도 이불에 지도 그린 적 있겠네?”
“그런 적은 없습니다!”
“왜~ 남들처럼 애기 시절도 있었다면서. 기저귀도 찼을 거고.....”
하태성이 새빨개져서 허건오에게 덤벼들었다. 자기가 말해놓고 웃느라 허건오는 피하지 못했다. 김주황도 장롱을 긁으며 웃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멱살을 쥐고 엎치락뒤치락 한 끝에 허건오가 벽에 떠밀렸다. 그러면서 정강이쯤에 무언가 걸리는 바람에 그대로 기우뚱 넘어졌다. 걸린 것도 함께 와당탕 소리를 내었다.
기시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기껏 곱게 정리했던 밥상이 다시 네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거 무슨 일 있니?”
드르륵.
하태성이 벌떡 일어났다. 허건오도 일어나려다 도로 주저앉았다.
어머님이 잔주름에 덮인 눈으로 밥상을 보았다. 쓰레받기에 있는 흰 조각들을 보았다.
“원, 다친 데는 없니?”
“예. 죄송해요.”
할머니가 빙긋이 웃었다.
“다 커서야 싸움 친구가 생긴 거냐. 어여 치워라. 밥 다 됐다.”
할머니가 문가에서 떨어져 부엌으로 사라지자 김주황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하태성도 안도의 한숨 비슷하게 날숨을 뱉었다.
“이거, 나리가 누명 써버렸네.”
“거창하게 말할 필요 없습니다. 겨우 연필꽂이 가지고.”
“응?”
갑작스런 시선집중에 하태성이 더 놀랐다.
“연필꽂이?”
“예.”
“연필꽂이였어?”
“뭐라고 생각했던 겁니까?”
‘골동품도 비자금도 유품도 아니었어?’라는 말을 삼키느라 허건오가 허둥댔다. 그러는 동안 김주황이 먼저 머릴 긁적였다.
“뭐, 비싼거면 어쩌나 했지.”
“전혀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태성은 완전히 평소 태도로 돌아와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곧 할머니가 저녁상을 들여야 하니 허건오와 김주황도 합류했다.
책과 필기구를 상 위에 놓으려는 김주황을 하태성이 만류했다. 그리고는 밥상이 있던 구석 바닥에 그냥 쌓았다.
“네 사람이 먹어야 하니 저 소반 하나론 무리입니다. 이것도 가운데 놓지요.”
평소 어머니와 둘이 먹던 둥근 소반 옆에 사각 밥상을 붙여놓자 할머니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익숙하게 어머니를 도와 상을 차리는 대장 나리를 보다 김주황은 구석에 자리 잃고 찌그러진 똑똑이 책들을 보았다. 그러다 애송이 역시 그쪽을 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어이, 애송이.”
“왜, 고릴라?”
할머니 귀를 피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먹고 나면 나가볼 건데.”
“응. 나도.”
“나가서 언제 다시 오는데?”
“아마 내일 아침?”
“애송이, 난 오늘 밤중에 아마 대장 나리 다시 볼 걸?”
“아, 왜?”
“그러니까 새 연필꽂이는 내가 산다.”
“누구 맘대로!”
“먼저 사는 게 임자니까.”
“이 고릴라가, 내가 깼는데 왜 니가 사!”
“언제는 나 때문이라며?”
할머니와 대장 나리가 이미 빤히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둘은 결국 소리 높여 투닥였다. 이러다 지금 또 뒤엎을까 겁이 난 하태성이 둘을 말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