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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하얗고 피처럼 붉은

Work Text:

"......봉합하면 살 수 있는 거야?"

"살기는....."

머리와 몸이 분리된 상태로, 온 방안에 피칠갑을 해놓고, 그녀는 잘도 그리 말했다.

"알고 있었지? 나, 아미가 태어나고 나서 좀 바뀐 거....."

"조금은."

"전에 자기가, 내 등에 있는 문신, 궁금해 했었잖아? 그게, 무려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수거든."

".....뭣이라."

이런 순간에도 급조한 땀방울을 머리에 가져다 붙이는 호찬을 보며, 스노우 화이트, 아니, 지금은 설희라 불리는 여자는 혀를 찼다.

"자기는 지금 내가 이렇게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데 그런 개그컷이 나와?"

"미안....."

"뭐, 그렇게 움직인다고 해도..... 감정은 말라붙어 버린 상태니까. 자기를 속여서 미안해."

호찬은, 조각나버린 아내의 왼손을 꼭 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대학때 피우던 담배 생각이 났다. 벌써 끊은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미가 놀랐겠다."

"......당신 딸인데, 이정도 일로. 그러면, 이번에도 살아날 수 있는 건가."

"아니."

고개를 저을 수 있다면 그랬을 것이다.

잃어버린 감정으로도 한번쯤은 더 꼭 안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순리에 따라 돌아가야 할 때.

-이 세상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좋은 연극이었지. 허나, 살아있는 듯 보이나 살아있지 않은, 죽은 자로 이 세상에 서 있는 생은 이제 끝낼 때가 된 것이다.

"내가 다시 살아서 나타나면, 자기와 아미가 위험하니까. 그때는 나도 패밀리로부터 당신을 지켜줄 수 없어. 있잖아, 아미가 태어날 때 나는 임신중독증으로 이미 한 번 죽었지만, 이 숫자 덕에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었지."

"그랬군......"

"그거 알아? 우리 패밀리의 능력은 죽음을 통해 유전되는 거야. 내가 한번 죽었으니까, 아미가 그 능력을 받았겠지. 그래서 그 아이를 일부러 맹하게 키우려고 애썼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그 아이가 어른이 될 때 까지는 살아야 하니까."

"패밀리가 알면, 아미도 노리게 될까."

"틀림없이. 그러니까 자기가 데리고 있지 말아요. 당신 누나에게 갖다 맡기면 적어도 남들 눈에 띌 만큼 똑똑한 아이는 되지 못할 거야. 나를 싫어했으니 아미라고 예뻐할 리가 없어. 알았지? 그리고 당신을 지키는 것은, 도로시가 마저 다 해 줄 거야. 아마도 틀림없이."

"도로시는 무엇이든지 읽는다 했잖아. 어째서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건지 모르겠어."

"그 아이...... 자기도 그런 보석같은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가끔 나 질투하거든."

그런 몰골을 하고도 스노우는 웃었다.

"사람의 감정을 잃었다고 해도, 남의 마음까지 모르는 것은 아냐. 그 애, 질투해서 말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그 애가, 나를 죽이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을 걸. 이번에도 내가 그 난관을 이겨낼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토막을 내어서야, 다시 산 사람 행세를 할 수도 없잖아. 적어도 목이 잘렸는걸. 그러니까 자기, 난 지금 죽는 것이 가장 좋겠어. 가급적 오래오래 자기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차라리 총이나 다른 방법을 썼으면 계속 속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

온 방안이 아내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창 밖에 펼쳐진 하늘이 너무나 맑았다. 호찬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모든 게 꿈이려니, 그리 믿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가사가 의심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내 목을 잘랐지. 그 모든 과정을 은폐한 것은 루이스야. 그 애가 주위의 모든 시간을 조작해 버려서, 나는 완전히 세상에 없는 허수의 시간동안 죽은 셈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 모든 것을 묵인한 것은 역시 B. B였고. 재수없는 영감, 내가 없었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는데, 이런 식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이 제일 싫어."

"설희, 말하지 마."

"B. B를 다시 만나려면, 대통령이 되는 거야."

"설희......"

"내 능력을 알잖아. 선택자. 당신은 내가 선택했고, 내가, 앞으로 10년 뒤 한국의 대통령으로 선택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도로시가 당신을 도울 테니까. 아미는 사 회장 댁에 가 있으면 구박은 받아도, 적어도 죽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저 앞으로 향하기만 하면 돼. 알겠죠? 내 말, 믿는거지?"

"그래..... 여왕님."

처음 만났던 시절, 그 대학 시절에 불렀던 별명으로 부르자 설희는 웃었다. 그녀는 눈짓으로 호찬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했다. 아아, 이것이 마지막이겠지. 호찬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늘 듣는 일상적인 말이 아닌, 이런 순간에는 남의 나라 말이기에 오히려 더 가슴을 파고드는 세 마디 말이 귓가에 맺혔다. 호찬은 날이 어두워 질 때 까지 그대로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 가득, 꾸덕하게 굳어가는 피 구덩이 사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새카만 머리카락이, 아프도록 안타깝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아미야."

"응, 아빠!"

그녀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 그래서였을까. 남들은 딸을 보면 그리도 사랑스럽다는데, 어째 그리 정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본능적으로 그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많이 아프니까, 고모 댁에서 세 밤만 자고 오자. 그래야겠구나."

"엄마 많이 아파? 아까 빨리 나으시라고 이불......"

"그래, 일단 고모 댁에 가야겠다. 알았지."